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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말은 밥을 먹으며 슬픔을 뛰어넘기
2020/03/24  06:01:10  매일경제
[허연의 아포리즘-77]

#187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최근까지 오정희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다.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아서였지만.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문청 시절 남들은 오정희 중단편을 필사해야 한다고 수선을 떨었지만 난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나중에 문단에 등단하고 신문사 문화부에서 일을 하면서 아주 간혹 오정희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 한켠이 좀 찝찝했다. 선생에게 내 시집을 보내드리고 잘 읽었다는 답신을 받으면서도 난 선생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최근 아주 우연히 오정희 소설집을 읽게 됐다. 직장 동료 책상 위에 재출간된 오정희 중단편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난 얼른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운명의 장난으로 뒤늦게서야 만난 인연이라도 되는 듯 점심시간도 거른 채 몰입해서 읽었다.

소설은 좋았다. 읽는 내내 난 자꾸만 대여섯 살 무렵 어린 날의 어떤 장면이 생각났다.

나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피란 갔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가진 채 살았던 세대였다. 내가 대여섯 살 때면 전쟁이 끝난 지 이십 년도 채 안 지난 일이었으니 그 끔찍한 일이 뇌리에 생생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길에 시체가 널려 있고, 몇날 며칠을 굶은 채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시절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밤에 사이렌 소리가 종종 들리곤 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에 트라우마까지 있는 어머니는 조건반사처럼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고 나를 깨워서 옷을 입혔다.

두꺼운 양말에 바지 두 겹, 목도리에 모자까지 씌우고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엄마랑 헤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또박또박 엄마 아빠 이름, 주소 말해라. 엄마가 찾으러 올 테니 그때까지 밥 먹여주면 보답하겠다고 하고. 따발총 소리 나면 무조건 엎드리고 솜이불도 따발총알은 못 막는다…알았지 바오로야."난 오정희 소설을 읽으며 자꾸 그 밤이 생각났다. 백열등의 흐릿한 불빛, 엄마가 옷을 꺼내던 옻칠이 벗겨진 반다지, 잠결에도 나를 움찔하게 했던 사이렌 소리, 엄마가 다급하게 입에 넣어주던 엿이나 떡. 서울 변두리 작은 한옥에서 일어난 소소한 해프닝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함이 깔려 있었다.

오정희 소설이 그랬다. 어느 거리, 어느 집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상을 그렸지만 너무나 유장했다. 태연함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비장함. 그것이 나를 흔들었다.

오정희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만남도 헤어짐도, 삶도 죽음도 소소하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노파도, 검은 지프차를 타고 나타나는 관리도, 미군에게 웃음을 팔아야 했던 여인도, 병석에 누워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도, 그것을 지켜보는 화자도…모두 던져진 생을 배우처럼 살 뿐이다. 역사책에 단 한 줄 남을 일 없는 생이지만 그들은 살아간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원통해 하고 때로운 희망 같은 것도 품고, 때로는 웃기도 하면서….

그렇다. 산다는 건 어제 피를 토할 비극이 있었더라도 오늘 물 말은 밥을 먹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비장하고 소소하다.

[허연 문화 전문기자·시인][ⓒ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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