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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책과 지성] "딸들아 용서는 해가 지기 전에 하는 거란다"
2020/03/21  00:08:08  매일경제

"해가 지기 전에는 용서해야지."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을 봤다. 영화가 끝나고 이상하게도 이 대사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연극을 보러 가면서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은 언니 조에게 화가 난 에이미는 조가 천금같이 아끼는 소설 초고를 불태운다. 영혼의 일부를 잃어버린 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중재에 나선 어머니 마치가 한 말이다.

'용서는 해가 지기 전에 하는 것'이라니 무슨 뜻일까. 난 이렇게 이해했다. 밤이 오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 분노가 증폭되기 전에 빨리 용서하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분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화해는 점점 멀어지니까.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게 되니까. 소설도 잃고 동생도 잃게 되니까. 모두 영원한 패배자가 되니까.

이 구절은 소설 전체의 냄새와도 맞닿아 있다. 소설의 핵심 주인공인 조는 '용서'라는 형식으로 자기의 성을 쌓는다.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지금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조는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19세기 여성에게 씐 부당한 편견과 싸운다.

"나는 여자들이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너무 지겨워!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여자들에게는 야망이 있고, 재능이 있어. 그냥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라고."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녀는 여전사의 모습이 아닌 용서하는 자의 자세로 이것들을 지켜냈다. 문학을 지켜냈고, 가족을 지켰고, 책의 판권을 지켜냈고, 학교를 세웠다. 사랑은 못 지키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 생각은 다르다. 물론 영화에서는 조가 로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원작을 보면 로리에 대한 조의 생각은 '남사친'에 가깝다. 성적 긴장이 없는 우정에 더 가깝다. 로리와 에이미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화들짝 놀라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놀라움일 뿐이다.

소설 '작은 아씨들'은 시대를 많이 앞서간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네 자매만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 주체 소설이 나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소설에서 남성들은 네 자매의 캐릭터를 살려주는 조연일 뿐이다. 규범대로 살아가는 걸 선택한 온화한 큰언니 메그, 통념을 거부하고 자주적 삶을 사는 둘째 조, 소심하지만 착하고 현명한 베스, 다소 이기적이지만 귀여운 막내 에이미. 이렇게 네 자매는 세상의 모든 여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캐릭터다. 이후에 쏟아져 나온, 자매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는 모두 '작은 아씨들'의 변주다.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컷은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 조와 거의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소설을 썼고, 아동 교육과 여성 참정권 운동에 헌신했다.

"늙어서 관절이 굳을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날까지 계속 뛸 거야. 나를 철들게 하려고 재촉하지는 마, 언니. 나는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어."조가 외친 이 독립선언은 여성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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