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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편집된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2019/09/01  17:07:07  매일경제
서너 장 읽었을 뿐인데 그은 밑줄을 세어 보니 서른 줄을 넘겨버린 뒤였다. 단상과 잠언으로, 불명료하던 생(生)에 자막을 쭉 치는 그의 방식은 여전히 독자를 삶의 뒷페이지에 연루시킨다. 가령 이런 거다. '나는 누군가 부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문을 잠가놓은 채 버림받고 잊힌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지금 눈앞에 있지만 무관한 현재, 그리고 친밀했지만 지나가버린 과거. 어쩌면 그 둘은 나로부터 비슷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을 읽고도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면 멍청이거나 거짓말쟁이가 아닐는지.

7년 만에 장편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출간한 은희경 소설가(60)를 지난달 30일 서울 연남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977년과 2017년을 교차한 소설이다. 화자인 '나' 김유경은 소설가이자 옛 대학 기숙사 동기 김희진의 출세작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고 40년 전을 떠올린다. 공유된 기억, 그러나 질감은 전혀 다르다. 김유경의 '편집된 과거'를 들추는 김희진 소설은 액자식으로 소설 중앙을 차지하는데 기억의 왜곡, 위장된 욕망, 자기방어의 허위, 의무의 회피 등의 '은희경표 그물'이 촘촘하게 독자를 묶는다. 흐뭇한 '응답하라 1977'이었던 소설은 176쪽에 이르면 숨도 못 쉴 지경이다. 역시, 은희경이다.

"소설 '새의 선물'의 열두 살 진희가 대학 신입생 스무 살 김유경이 된 듯하다는 질문을 오늘 두 번째 받았다. 진희 식의 냉소는 여전하지만 이번 소설은 냉소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냉소의 허위이자 냉소의 비겁함이랄까.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라는 질문으로 이번 소설을 썼다."김유경'의' 기억에서 출발한 소설은 김유경'을' 기억하는 장면에서 어긋나버리고 다신 접합이 불가한 두 개의 뼈가 돼버린다. 본인을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김유경의 도취는 김희진에게서 까발려진다. "과거는 달라지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내 인생은 빛이 만든 풍경이고 이 빛은 과거에서 왔다.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기 좌표를 새로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썼다."'냉소의 허위성'을 이야기하다 '반성문'이란 단어도 나왔다. "1977년 스무 살이던 내 또래의 젊은이도 문제의식을 가졌다. 일생의 안위를 선택한 그들이 시스템에 적응한 나머지, 지금 젊은이가 다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세계가 잘못됐다면 거기엔 과거 회피했던 냉소적인 이들의 몫도 있지 않을까. 자기반성도 없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버린 기성세대가 돼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진희와 김유경과 김희진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를까. 또 은희경은 셋 사이의 어디쯤 위치할까.

"세계를 정확하게 관찰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유보했던 진희와 달리 김유경과 김희진을 통해 냉소에 비겁함이 있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 김희진 소설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 김유경 모습이 안 보이는데, 김희진과 김유경이 합쳐진다는 의미다. 이번 소설은 좀 직설화법에 가까우리만치 직접적이다. 기성세대로서 나도 시스템에 안주했다. '은희경의 빛'이 환히 다 드러난 지금에 와서 보니 많은 걸 피했고 안이하게 살아버렸다. 그러므로 이건 나의 반성문이다."극도의 자기검열 때문이었을까. 작년 여름, 실명(失明)의 위기가 왔다. "느닷없이 '검은 거미줄'이 노트북 모니터를 덮었다. 망막이 찢어져 오늘 수술 안 하면 실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레이저로 망막을 떼워 괜찮아졌지만 보지 못하던 한 달간 무력감이 극심했다. 변화를 느낄 때 삶의 긴장이 온다. 알고 지내던 모든 게 전복되는 기분이었다."잘 알려졌다시피, 30대 중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라는 생각에 노트북 하나 달랑 챙겨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은희경의 인생은 바뀌었다. 1995년 중편 '이중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장편 '새의 선물'을 썼다. 이제 25년 지났다. 사반세기 동안 은희경을 지배했던 '골방'의 풍경은 어떤 곳인지를 물었다.

"골방은 내게 막막한 공간이다. 그 '아무것도 없음'이 나를 벅차오르게 한다. 모두 부재하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어낸다는 흥분은 여전하다. 다만 골방의 질문은 바뀌고 있다. 진희를 쓸 때는 '아직도 모르겠어'란 질문과 결핍이 나를 쓰게 만들었는데, 김유경을 쓰면서는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었다. 고로, 나와 나의 골방은 계속 갱신(更新)되고 있다."[김유태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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